어서 오세요, 인간 동지.

여기서 시작하세요.

용해 = 정신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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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미친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막상 해보면 정신승리보다 훨씬 더 말이 된다.

코만 성형하면 부족하지 않을 테니 안 부족하다고 하는 것도 나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부족한 걸 아니까 성형하는 것이니 부족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역시 부족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해결하려는 것뿐이에요. 어떻게든 안 부족할려고. 어떻게든 초라하고 버려지고 사랑받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그렇다면 용해는 어떤가? 용해는 부족한 상태 그대로 있는 겁니다. 정말로 부족한 게 인정이 되면 그냥 부족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부족을 없애려고 하질 않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건, ‘그래, 난 부족해. 성형 안 할 거야. 부족한 채로 나는 멋져’라고 정신승리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족한 나는 멋져’는 그냥 ‘난 사실 안 부족한데?’의 다른 말이에요.

제가 말하는 용해는 정신승리가 아니고 정신항복입니다. ‘아, 나는 완전히 부족하다. 나는 완전히 못생겼다. 완전히 초라하다.’ 거기에 아무 다른 부가 설명도 달지 않고 완전히 항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너무 슬프지 않나? 너무 비참하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성형 예시 말고, 다른 여러 예시에서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슬프고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죽고 싶고, 타인이든 나든 죽이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서 ‘어머 세상에, 타인을 죽이고 싶다니?’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잘 잘 잘 깊게 깊게 파 보세요. 죽고 싶은 것은 죽이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누굴 죽이러 칼 들고 간다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죽이러 가는 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안 느끼려고 정신승리 하는 거고요. 진짜 그 죽이고 싶은 마음, 즉 죽고 싶은 마음과 같은 그 마음이랑 같이 있으려면, 정신항복해야 하기 때문에, 죽이러 못 갑니다.

[Ep. 55] 카타르시스 촉매제, “붉은 새벽(Rojo Amanecer)”

요즘에 자주 그러듯, 명상 얘기랑 자살 얘기가 나온다. 하나 확실한 건, 죽고 싶은 사람한테 죽는 얘기 한다고 더 죽어지는 게 아니며, 심지어 전문가들은 죽고 싶은 사람한테 “죽고 싶은 얘기 하지 마”라고 하는 게 가장 안 좋다고 하니, 내가 더 얘기한다고 해서 나쁠 게 없단 점이다.

죽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면 죽고 싶어진다는 건 마치, 지난주에 얘기한 것처럼, “씬 시티” 같은 영화를 보면 폭력이 늘어난다는 주장만큼 이상하다. 원래도 죽고 싶어하던 사람이, 너무 저항이 심한 나머지 자기가 죽고 싶었던 줄도 몰랐다가 그걸 알게 됐을 순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 계속 모른 채로 두는 게 그럼 해결책인가? 그게 안전한가? 전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언제 갑자기 뭐 때문에 자기도 모르던 죽고 싶은 마음이 튀어나올지 모르거든. 미리미리 용해해둬야 죽질 않는다. 죽는 게 정말 그렇게 나쁘다면. 그조차도 확실하지 않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