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5월노트’로 태드되어 있었던 포스트들을 이 블로그에서 전부 삭제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이트에 이제 포스트가 제법 쌓였기 때문!
- 내 몸 안의 ‘나.’: 우리는 ‘나’의 위치를 몸의 한 부분으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가슴 부분으로요.
- 첫 용어 몇 개.: 몸, 마음, 아바타, 시점에 대한 간략 정의.
- 내 몸 밖의 ‘나’?: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몸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마음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이 전환은 쉽습니다.
- 시간, 공간, 그리고 시점.: 시점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의동할 수 있는데, 이때 각 좌표에게 동등한 무게/견고함/타당성을 부여합니다.
- 아바타 세상 너머의 ‘나.’: 시점 덕분에 우리는 몸, 아바타, 그리고 아바타 세상 전반 너머의 다양한 것들이 (동시에) 될 수 있습니다.
- ‘상상’과 ‘진짜’의 구분에 대하여.: 그러한 부분은 잘해야 모호하고,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아임 드리밍에서 직간접적으로 이 세계관에 대해 계속 언급하게 될 것 같다. 사이트 자체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음… 사이트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음… 좀 더 정보가 쌓여 있을 때 더 유용할 것 같아서? 아주아주 많이 관심 있는 사람들만 발견하라고?
유튜브 채널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좀 영상이 이미 여럿 쌓인 상태일 때 더 유용하기도 하거니와, 그때 사용자로서 기억이 더 잘 나는 것 같다. 영상이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채널인 경우, 그 영상이 아무리 기똥차도 구독을 누르게 되진 않는다, 잘. 누르더라도, 약간 기억이 안 나는…? 내가 이 채널을 언제 구독했나 싶은…? 영상을 몰아볼 수가 없어서 답답한?
반면, 영상이 20개 정도 쌓인 채널이라 하면, 일단 그 20개를 몰아보고 구독을 누르는데, 그다음부터는 영상이 매우 띄엄띄엄 올라와도 괜찮은 느낌이 든다.
그냥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이런 건지, 무슨 전반적인 인간의 심리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세계관을 정리하고 개인 소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 올리는 이유는 물론 누군가가 보고 이 세계관을 도입했으면 해서다. 이 세계관의 이름이 ‘이야기꾼의 눈’인 이유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의 툴박스 같은 것이라서다. 마치 작가가 한 번 글 쓰는 걸 몸으로 느꼈으면, 그 스킬로 그 어떤 이야기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퇴마 사제 이야기를 쓰는 데 들어가는 스킬과 러브 스토리를 쓰는 데 들어가는 스킬은 근본적으로 같다. 그 작가의 세계관(그 작가에게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세계관)이 ‘나는 작가다’라서 그렇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뭐든 쓸 수 있다. ‘나는 이 글밖에 못 쓰고 다른 건 못 써’라는 세계관을 도입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꾼의 눈’ 세계관은 그야말로 아무나 가져다가 자기 구미대로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구조를 이루는 정보가 몇 개 있기에 세계관이긴 세계관인 것. 그렇지만 또 그래도, 나머지는 전부 자기가 직접 몸으로 익히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 ‘같은 세계관’을 쓰면서도 결국 양상이 다 다르게 나올 것이다. 마치 하나의 작가가 천 개의 이야기로 천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세계관은 개인에게는 과학이다. 개인은 세계관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안 주어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은 개인 바깥에서는 과학일 수 없다. 그 개인이 뭘 겪는지 개인 말고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계관을 개인 소장하지 않고 인터넷에 올렸는데, 그러면서 나 개인에게도 매우 유용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을 쓸 때 내가 ‘발견’을 해가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는 비유를 한 적이 있었다. 숲에 지도 없이 걸어들어가서 숲을 발견하는 것처럼. 이 비유가 틀린 건 아니다. 분명, 아바타의 입장에서 이것은 맞다. 나는 아바타 세상에서 이야기꾼이기도 한 아바타라서 더 흥미롭다. 그런데 아바타 이야기꾼인 나의 이야기꾼이 또 있다는 세계관 안에서는, 나는 ‘발견’을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
‘이야기꾼의 눈’ 사이트에다가 글을 쓰면서는 그 느낌이 더 두드러진다. 이건 확실히 뭔가… 뭔가 소설의 플롯을 풀어나가면서 그 과정을 마치 내가 ‘몰랐던’ 것처럼 즐기는 게 아니다. 거기다 쓰는 논픽션 포스트들은 확실히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걸 글로 쓰면서 또 아는 느낌? 그런 느낌이다. 이미 말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데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한담? 이런 느낌. 그래서 같으면서도 좀 다르다. 재밌다.
또 하나, 이야기꾼의 눈 포스트들을 쓰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 나는 내 삶의 서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