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인간 동지.

여기서 시작하세요.

얼굴, 이름

공개 날짜:

// 태그:

[2021년 9월에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글]

얼마 전에 친구랑 얘기하다가 ‘데스노트’가 언급됐다.

만화 데스노트. 하도 오래전에 봐서 내용이 많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제는 이랬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얼굴과 본명을 알고, 그 본명과 사망 원인을 데스노트에 적으면, 그 사람은 그 사망 원인대로 죽게 된다.’

이것이 왠지 말이 되는 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얼굴과 본명에 부여하는 힘이 크기 때문일 거다. 순 판타지인데도 왠지… ‘누군가의 키와 몸무게를 알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야, ‘본명과 얼굴을 알면 죽일 수 있다’는 게 훨씬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퇴마 장르에서는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악마더러 ‘네 이름을 말해라!!!’ 하는 것이다. 이름을 알면 무찌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꼭 별명이 아니라 본명이다. 보통은 본명을 대라는 이 장면 전에 악마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는 시도가 있다. 즉, 엔터테인먼트성 퇴마도 똑같다. 얼굴 + 본명을 아는 것이 무기다.

인터넷 세상을 유영하는 사람 중 많은 이는 퇴마나 데스노트를 걱정하는 자처럼 자신의 얼굴과 본명을 숨긴다. 내가 그중 하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오히려 퇴마나 데스노트를 가까이에서 경험해 볼 일이 생긴다면 환호성을 지를 자다. (킹 익사이팅. 귀신 환영. 궁금.) 그러니 그게 무서워서 본명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다. 또한 ‘정체’를 들킬까 봐서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정체 아닌 것에 낙인찍힐까 봐서고, 그들 착각 속에서는 그대로 살까 봐서다. 나도 모르는 나를 누가 단지 본명과 얼굴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안다’고 주장할 때 그자 머릿속에 생길 내 거짓된 ‘정체’가 싫어서.

만약 내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을 어디 한번 읊어 보라 한다면, 너는 단 하나도 옳게 읊지 못할 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너는 꽃의 얼굴을 들이대면 그 이름을 읊어주는 앱보다도 내 본질을 모를 확률이 높으니까.

나한테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해를 얼마나 비춰야 하는지, 토양은 어때야 하는지, 나도 몰라서 매일 틀리고, 알다가도 바뀌어서 또 헤매는 바람에 내 이 두 다리로 그 물, 해, 토양을 찾아가지를 못하는데, 네가 정답을 알 리가 없으니까.

혹은 만에 하나, 정말 말 그대로 1만 중 하나의 경우에는 이렇겠지: 너는 정답을 안다. 그런데 내게 그것들을 줄 수가 없다. 네 정원에 사는 꽃에게조차 그것이 요하는 요소들을 줄 수가 없는데, 나한테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여 본명과 얼굴은 내 본질 중 가장 껍데기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보호해야 하는 껍데기다.

다행히 글 쓰는 일(특히 픽션)에는 얼굴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도 글 쓰는 사람더러 무대 위에 올라가라고 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활동명이 본명이 아니라고 해서 사기라느니, 필명이 여러 개라서 사기라느니, 그런 식으로 따지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이 세상 여러 일 중 특히나 글 쓰는 자에게 이런 관례가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란 뜻일지도 모른다. 퇴마도 데스노트도. 퇴마사나 데스노트도 아니면서 마치 본질에 다가가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자들도.

이렇게나 두려운 게 없으니, 누가 퇴마하고 싶을 만한 글을 쓰란 얘긴가. ‘그래, 내 본명을 데스노트에 적으려고 궁금해해봐라! 하지만 얼굴을 모르니까 어차피 용용 죽겠지!’ 이런 태도를 가지란 뜻인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악마의 책이라며 그걸 여러 권 모아서 불태운 종교 집단이 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처럼 무형인 것을 굳이 유형 상징화해서 불태우는 노력을 들이다니! 그래서 내 글을 엄청 싫어하는 미친 컬트가 생기는 건 ‘미래에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일 중 하나다. 다만 나는 조앤 씨와는 세대 차이도 있고 취향 차이도 있어서, 내 글을 태우려면 불만 지펴야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종이를 구해서 프린트한 다음에 태워야 할 거다. 아, ‘희생’이란 개념을 제대로 유형화하고 싶다면 내 글을 담은 아이패드를 여럿 태우는 방법도 있겠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희생일 것이다. 사과를 여럿 태우면 너희의 성스러움을 내 인정해 주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도 본명도 없는 나는 악령처럼 계속 너희가 죽여 없애려는 그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니. 나의 본질은 껍데기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