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아래 글은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가 시작하고서 얼마 안 됐을 때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몰랐을 때 그것이 혹시 본격 뉴스레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 썼던 것이다.
무려 1년도 넘게 전에!
혜원이는 내가 이 글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다 올린다.
글
혜원에게.
막상 카톡과 줌의 세계를 떠나 이렇게 실시간으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형식으로 말을 하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일단 첫 편지인 만큼 혜원과 모그타를 진행하게 되어 영광으로……
아, 이건 너무 정해진 루트다. 더 중요하게는, 영광이라고 말해버리면 그다음에 할 말이 없어지니까, 마찬가지로 정해진 루트이기는 하나 좀 더 할 말이 많이 파생되는 길을 택해보자. 이왕이면 혜원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모그타의 탄생을 기념해서 그로테스크한 나의 소개이자 출사표 비스무리한 것까지도 연결될 법한 그런 주제.
바로 날씨 얘기다.
<날씨>
날씨 얘기를 하면 어마어마하게 싱거운 사람 취급을 받는 문화가 어떤 나라들에는 있다. 할 말이 없어서 날씨 얘기나 하느냐는 식이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한국식 (동양식인가?) 편지의 인사법과 사뭇 다르다. 모름지기 편지는 ‘땡땡 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바람이 제법 찹니다……’ 같은 말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뭐, 누가 언제 어떻게 정했을지 모르는 형식이야 무시해도 상관 없다 치더라도,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달에도 갔고 이제 화성에서도 살게 될 거라는 그 대단한 인류께서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날씨라는 거대한 수수께끼가 웬만한 인간사보다 어떻게 더 재미 없을 수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혜원은 그런 자가 아니지. 남들을 따라 뭔가를 싱겁게 여길 만큼 한가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구름과 비와 해와 달에 얽힌 온 세계의 구전 신화와 거기서 파생된 문학과 음악과 미술이 의미 있음을 알지.
어쩌면 화성에 가게 될 때쯤이면 날씨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줄지도 모르는 과학과 그 과학에 관한 환상과 가능과 불가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열려 있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거지.
그러니까 서두가 긴데, 다음 발언은 정말 해야겠어서 하는 말이라는 게 요지다.
여름이 왔다. 날씨가 너무 더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혜원과 전화하면서 ‘뭔가’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봄이었는데.
<‘뭔가’>
그때는 통화를 하느라 온 창문을 다 닫고 방에 앉아 있어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냉방? 물론 안 했다. 아마 옷을 껴입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방에 빛이 많이 들어와도, 남부 캘리포니아 중에서도 해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곳은 3월에는 아직 추웠다.
그런데 지금은 늦은 밤까지도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더워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여름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 책상에 앉기 전에 선풍기를 틀면, 어젯밤 자기 직전 선풍기를 끄고 마지막으로 휘휘 생각을 적어 이리저리 널어놓았던 온갖 쪽지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흩어진다.
(여담 1.
신경생물학이었나, 그런 강의에서 주워들은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는 더위가 추위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하더라.
추위는 옷을 껴입고 불을 지피는 것으로 해결되지만, 더우면 그야말로 뇌를 담은 머릿속의 모든 것들이 팽창하고, 그러면 인간이란 속수무책으로 그냥 죽는 거라더라. 그래서 그 교수는 지금 이 시대처럼 기술의 축복을 받은 시대에는 냉방을 인간의 존엄한 권리로 분류해야 한다더라.
봐라, 날씨.
이거보다 흥미진진한 것도 별로 없다.)
아무튼, 왜 혜원이랑 ‘뭔가’를 하고자 하면 그 ‘뭔가’가 실제로 행해질 거라고 여겼는지, 통화를 마친 직후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오늘 결심한 건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은 않을 만큼의 진실을 품고 있다는 건 널리 인정된 사실이 아닌가.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나를 믿고 혜원을 믿으며 ‘뭔가’를 하자고 동의했을까? ‘뭔가’가 뭔지도 정하지 않고서!
돌이켜 보면 희한……
아니, 그게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희한한 부분은, 동의의 순간이 희한했어야 했는데도 당시에는 희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안 희한했던 게 희한하다. 돌이켜 봐야지만 희한하다. 그것이 진짜 미스터리다.
우리는 십여 년 전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자주 보던 사이였지만, 오래도록 직종도 사는 곳도 달랐고, 그렇다고 연락을 자주 했느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럼 학교를 아주 오래 같이 다녀서 그 함께한 세월의 무게로 함께하지 않은 세월을 상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닌 건 3년이었고, 그 중 서로의 존재를 알았던 건 2년 정도였다. 게다가 같은 반도 아니었다.
심지어 청소년기야 이제는 옛날 얘기이니 중요하지 않다고 쳐도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뭔가’가 언급되었을 당시에 혜원은 내 필명을 몰랐고, 나는 혜원의 이력서를 본 적 없었다.
그러니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들 때문에 ‘나랑 이걸 할 사람은 바로 너!’ 한 건 아니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가까이 살고 졸업 후 평생 같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아마 반드시 ‘뭔가’를 같이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만약 그런 요소가 중요했더라면 혜원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뭔가’를 하자고 제안하는 게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미스터리하다. 모그타는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사실, 지금은 나름의 해답을 엮어놓았다. 아임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인 때도 있다. 그러니 계획이란 어떤 때에는 이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는 모르지만, 시작하고 나면 다 제자리를 찾아간다.
봐라. 이미 제‘자리’라는 말이 나왔지 않은가.
그래, 그 해답이란, 바로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자리가 있어서 나에게는 ‘뭔가’를 하자는 혜원의 말이 아주 시의적절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도 하고 싶다고 했다.
이 무슨 낭만적이지 못한 소리냐.
그저 끼워 맞췄단 소리냐.
아니면 운명이었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거냐.
대체 뭔 소리냐.
이런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설명을 하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낭만적이고, 전혀 끼워 맞추지 않았으며, 운명인 건 맞는 듯한 ‘자리’의 의미를.
<자리>
그건 아주 오래오래 비워놓았던 자리였다.
시간적 물질적 자리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거창한 건 아닌데, 그것을 비워둠으로 인하여 비워두지 않은 부분들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게끔 하는 공란이었다. 또한 처음부터 저절로 있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열심히, 의식적으로 비게끔 지속한 자리였다. 지금도 많은 부분, 그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비누 하나를 사도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얼마큼 남아 있으며 결국 그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 어느 한 켠에는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그 뒤치닥거리를 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주고 있다는 눈치조차 주지 않는 친절한 누군가가 인생을 관리해주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하찮은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정보가 너무 자주 완전히 잊혀진다면 (그러니까 비누 한 개는 괜찮은데, 계속 까먹고 새 걸 사서 비누가 백 개가 된다면) 삶은 자꾸만 무한독립을 반복하는 1인 가구 같은 게 되고 만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거다. 혼자 살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어이가 없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 사는데 왜 이리 필요한 게 많은 거냐고.
비누는 물론이고 가위도 하나는 있어야지.
칼도. 손톱깎이도. 족집게도.
빗. 양초. 성냥.
음식에 들어갈 것들까지 치면 끝이 없지. 사람 하나 먹이자고 간장, 고추장, 식초, 이런 것들이 한 통씩은 필요하다니. 한 숟갈씩 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왠만큼 자주 요리할 게 아니면 시켜 먹는 게 남는 장사일 수도 있다는 게 괜히 나오는 말은 아니다.
이런 1인 가구 살림살이의 상황과 처음에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비슷하다.
무슨 일을 하나라도 시작하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어도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오버헤드가 있다. 그러니 자잘한 일을 여럿 시작하면 결과물은 없고 초반 투자만 줄줄이 하게 된다. 맨날 새로이 독립해서 맨날 새로이 물건을 사들이는 1인 가구 같다.
전에 샀던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뭐 하나 그럴싸한 찌개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그냥 계속 간장 된장 고추장을 사기만 한다. 심지어 1인 가구로서 실제로 독립하기도 전에 간장 된장 고추장은 어디 브랜드 것이 제일 좋은지 조사만 끝도 없이 하기도 한다. 열심히 네트워킹도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무슨 간장 드세요?’ 물어본다. 마치 간장 브랜드만 잘 고르면 혼자 잘 살 것처럼.
물론 비유적, 실질적 간장의 세계는 파면 팔 수록 끝이 없어서, 그 자체로 매력적이긴 하다. 쇼핑의 세계도 그렇고, 자꾸만 새로이 판을 까는 것도 그렇고.
하면 좋을 것 같은 일은 늘 너무나 많다. 새로운 언어도 좀 더 배우면 좋을 것 같고, 기타를 어마무시하게 잘 치면 좋을 것 같고, 서핑을 배워보면 좋겠다.
어린이와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되고, 한 번만이라도 온 집이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정리정돈되어 깨끗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도 여긴다.
초급 외국어를 가르치는 책이 책상에 쌓이고, 기타+케이스가 한 대도 아니고 종류별로 관처럼 옷장 한구석에 보초를 서고 있으며, How to surf 비디오가 유튜브의 Watch Later 리스트를 채운다. (서핑보드로 물질세계를 채우지 않은 게 극도로 다행이지.)
괜히 봉사 단체들을 검색해 본다. ‘오늘은 꼭 블라인드 닦기’를 to do list에 추가하고, 내일로 미룬다.
‘한다’고 생각하며 정작 단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쓰다 만 비누, 먹다 만 간장, 한 번 쓰고 다시는 안 쓴 손톱깎이들이 주체할 수 없이 쌓인다.
혜원에게서 연락이 오기 아주아주 오래 전, 내 머리속은 이렇게 장만하긴 했으나 다시 쓸지는 알 수 없는 1인 가구 물품들로 가득했었다. 버리기도 애매했고, 업그레이드하기에는 더더욱 애매했다. 뭔가를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실은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하지 않은 건, 이미 사 놓은 비누 무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쓰지도 않을 비누를 하도 많이 사서 무더기가 되었는데, 그 무더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새 비누를 더 사기만 하고, 비누로 조각을 한다든가 손을 씻어본다든가 하는 쓸모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았단 말이다. (비유적으로. 어디까지나 이건 비유적으로. 실제로는 손을 잘 씻는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 너무나 많은 하고 싶은 일들 때문에 ‘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데’를 말하고 다니는 시간이 실제로 하는 시간보다 더 많다는 걸 나도 뻔히 알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기준으로 무엇을 실제로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정한단 말인가. 다 흥미롭게 들리는데. 외국어 잘하는 사람 엄청 멋지고, 기타 잘 치는 사람 엄청 대단하고, 서핑은 잘한다면 무슨 기분일지 상상도 못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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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준을 정할 수가 없어서 언젠가부터 나는 이 1인 가구 살림살이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쓰지 않을 건데 신경 써서 무엇한단 말인가? 무시하는 거나, 쓰지 않는 거나, 효과는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자 시간이 좀 더 생기는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흥미에 따라 이리저리 독립한 1인 가구를 다 없앴으니, 이때 내가 정작 한 일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 않으면 망하는 일.
예시 1: 파산하지 않기 위한 월말 결산.
예시 2: 살기 위한 운동.
예시 3: 살기 위한 잠.
이게 무슨!
어느 날 이 원시적인 삶에 나는 빡이 쳤다. 예시 1, 2, 3만이 있는 삶은 마치 물리 법칙에 어긋난 삶 같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흔히 ‘껍데기밖에 없다’고 하는 게 나쁜 말인 것처럼 쓰이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껍데기라도 있으면 안도 있고 바깥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껍데기라는 게 있으면 뭐라도, 그러니까 곽이라고 해야 하나, 틀이라고 해야 하나, 뭘 담을 도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니, 굳이 나쁠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나는 1인 가구 살림들을 버리고는 껍데기 중에서도 바깥만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원시적인 삶이다. (내가 운동선수가 아닌 점을 감안해 주길. 프로 수면러도 아니고, 프로 월말 결산러는 더더욱 아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껍데기가 있으면 모름지기 안도 있고 밖도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밖만 있어? 어떻게 이렇게 다 표면에 드러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이 찝찝한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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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한테 껍데기 ‘안’이라는 게 있는지, 아니면 내가 바깥밖에 없는, 논리에도 물리에도 저항하는 존재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담 2.
이 부분이 운명의 시발점 같다. 내가 찝찝함을 느끼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아보기로 했다는 점.
이건 순전히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왜 무언가는 하지 않으면 괴롭고, 왜 무언가는 좋다고들 하는 건데도 그것을 안 했을 때 실은 사는 데 전혀 실질적, 심리적 지장이 없는지, 나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간에게 아주 근본적인 자유 의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내가 짜장면보다 짬뽕이 먹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치자. 이때 나는 실제로 짬뽕을 먹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괜히 본능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일부러 짜장면을 먹을 수도 있고, 둘 다 먹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왕이면 일부러라도 짬짜면을 먹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나의 자유 의지다. 그런데 처음에 왜 짜장면보다 짬뽕이 먹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길이 없다. 나는 내 자의로 짬뽕을 먹고 싶게끔 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외면밖에 없는 나의 껍데기를 보고 찝찝함을 느낀 결과로 아래의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지금 혜원과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자의가 아니라 운명에 가깝다. 마치 날씨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으나 끝에 가서 기상 현상이란 반드시 나타나며, 그것이 또 어떻게든 다른 기상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껍데기 밖을 따라가 보았다.
마치 지구 표면을 걷다가 웅덩이라도 나타나면 그 안에 풍덩 들어가 계속 잠수하고, 그러다 보면 핵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심정으로 가봤다.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껍데기 바깥을 따라가 봤다’고 함은 최대한 바깥에 드러난 것들을 다 해봤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걸 좀 해봤다. 그 중에서 표면스럽지 않은 일이 하나라도 있나 보려고.
엿 같았다.
당연한 말인데, 표면에는 표면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것들만 갖고 살 수 있는 게 나라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 살려고 월말 결산하고, 살려고 운동하고, 살려고 잠들려고 하다가 죽는 게 나라면 굳이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답이 나와 있지 않은가. ‘살려고’ 이것들을 하는데 사실 살아서 하는 것이 이것들 뿐이라면 왜 산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내 삶의 이 시대는 비유적 1인 가구로 넘쳐났던 시대보다 백 배는 더 암울하다. 비유적 1인 가구는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음’을 느낀다는 반증이기라도 하다. 그런데 표면의 삶이란 참으로 100% 엿 같다.
그러니 더 설명하지 않고 건너뛰자면, 그렇게 자꾸자꾸 표면을 따라 걷다가 보니 온 세상 어린이가 나오는 게 아니라, 화가 나서 발을 마구 구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땅이 꺼져버렸다.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는 틈새 같은 게 있었다. 일단 태어났으니 그냥 죽기엔 억울하니까, 원시적인 삶이라도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뭔가가 안팎을 이어주는 모양이었다. 일단 안이 있으기라도 하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길을 따라 지하로 가 보니 껍데기 안은……
없느니만 못한 광경이었다. 껍데기 내벽을 따라, 핵을 향해 거꾸로 솟아난 흉물스러운 물체는 건물이었다. 근데 다정한 농가가 아니었다. 잘 돌아가는 기업들이 가득한 수익률 좋은 사무실 빌딩도 아니었다. 심지어 교통이라도 편리한 사거리에 세워진, 예쁜 쓰레기 같은 복층 1인실이 가득한 삐까뻔쩍한 오피스텔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올드보이에 나왔던, 사람들을 감금해두려고 일부러 음침하게 만든 듯한, 음식으로는 만두밖에 안 나오는, 그런 무너져가는 건물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방이 여럿이었는데, 방음도 안 되고 (아, 올드보이에선 방음이 너무 잘되는 게 포인트인가?), 하여간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그 건물에서 사람이 제대로 삶직하게끔 만들려는 노력을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알고 보니 내가 성공적으로 무시한 줄 알았던 비누더미, 간장더미, 손톱깎기더미들이 전부 여기 있었다. 온갖 올드보이 감방들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물질세계에서는 내가 집에 이런 것들을 쌓아두면 공간이 미어터져서 새어나가 밖에서 누가 항의하겠지만, 껍데기 내면에서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비누 하나를 사도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얼마큼 남아 있으며 결국 그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는 하지 않았다. 누가 대신 뒤치닥거리를 해줄 수 없는 공간에서 그걸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끊지 않은 모든 것들은 아직도 ‘할지도 모르는’ 형태로 끈덕지게 나한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들이 내가 표면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 거였다. 안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보다 표면에 나와 사는 게 간단했으니까. 남들이 하는 것만 하면서 ‘다들 이렇게 산다’고 주장하면 굉장히 철들고 겸손하기까지 하다는 끔찍한 착각이 들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돌아가야 하나? 왔던 길을 돌아서 다시 표면으로?
이 감옥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여기 나무라도 하나 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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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이게 되나 안 되나 일단 보기로 했다. 무시를 통한 망각 말고, 진짜 대청소, 대해체 말이다.
철거 1순위는 외국어. 나는 더는 새로운 외국어를 내 레파토리에 추가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하는 언어들을 유지하기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잘하면 멋있는 게 외국어이긴 한데, 제대로 잘하려면 들어가야 하는 투자가 너무 많다. 애초에 외국어란 그것을 ‘한다’고 어디 가서 주장이라도 하려면은 1인 가구가 살 수 있는 원룸 (혹은 감방) 정도로 끝나는 건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동식 RV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여러 대를 어따 주차한담?
안 된다. 도저히 안 된다. 이 방들에 채웠던 건 모조리 처분.
악기도 더는 꿈도 꾸지 않기로 했다. 이미 배워뒀던 악기도 안 하는데 새로운 거 배운다고 할 거 같지 않았다.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악기는 특히나 계속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고, 나는 아마 반드시 악기를 계속하지 않을 거였다.
그러니 방 빼!
서핑은 뭐, 고민할 부분이 별로 없었다. 원래도 장비 필요한 운동은 안 했는데 뭐. 서핑도 하지 말자.
너도 방 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단순한 나는 감옥이 세워질 때와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갔다.
1인용 방만 가득하던 감옥이 무너져내렸다.
인생이 더 원시적이게 되었다. 1페이지만 읽은 그 수많은 외국어 책들, 통합 10시간도 치지 않은 기타들, 보지 않은 Watch Later 영상들을 내쫓자 아주 그냥 몸통이 텅텅 비었다.
그런데 약간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사우나 하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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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내 궁극의 ‘뭔가’가 폐허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야기하기였다. 픽션. 내 껍데기. 내부도 외부도 아닌 그 자체.
하고 싶기도 한데 하지 않으면 망하는 거. 그래서 ‘하고 싶은데 하지 않아도 살 만한 것들’인 1인 가구 아이들과 ‘딱히 하기 싫은데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들’인 껍데기 바깥 것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던 거.
오바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좀 안 쓴다고 어떻게 ‘망할’ 수가 있느냐고. 근데 이게 껍데기 바깥 것과 껍데기 그 자체의 차이인 것 같다.
껍데기 바깥 것은 하지 않으면 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예산을 짜면 좋고 잠을 자면 좋고 운동 하면 좋은 건 누구나 다 안다.
반면 껍데기 그 자체의 것은 하지 않아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하라고 할 사람이 없다. 나도 일부러 찾기 전에는 모르는데 타인이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춤을 춰야 하는 껍데기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국세청에서 일하고 있다면, 누가 그 사람한테 가서 ‘이보시오, 당신은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니오. 당신이 아무리 여러 겹의 옷으로 껍데기를 가리고 있어도 내 눈에는 훤히 보이오. 이 자리는 세금을 사랑하는 껍데기를 가진 자에게 넘겨주고, 당신은 춤을 춰야 하오.’라고 말한단 말인가?
심지어 껍데기보다는 껍데기 안의 것들이 유리하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취미를 가져보라고, 모험해보라고, 오늘을 만끽하라고 주장해댐으로써 돈을 번다.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니, 정말 간직할 만한 건 네가 알아서 골라야 한다’라는 진실로 돈을 벌기에는 너무 어렵고, 만약 누가 그 말을 들으려고 돈을 준다 하더라도 괜히 미안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니 아무거나 파는 것이다. 제일 가볍고 싼 걸로.
아무튼 내 경우에는, 글을 쓰기 전까지는 글을 쓰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뒤집어지고 살이 찌는 줄 몰랐다. 게다가 글을 써서 그것이 월말 결산 + 운동 + 잠까지 해결해 줄 것도 몰랐다. (그 시절은 잠깐이었고 지금은 다른 이유로 불면이 오지만……)
완전히 일석여러조인 것을 아주 그냥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냥 처음부터 껍데기를 그대로 갖고 살았으면 될 일을, 바깥으로는 옷으로 가리고 안으로는 굳이 핵을 찌를 만큼 높되 허접스러운 1인 가구 감옥을 짓고서는 걔를 누르고 있었다.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느라 뭘 ‘하는’ 줄 아는 동안, 껍데기는 샌드위치 속처럼 양쪽에서 짓눌려 존재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근데 얘가 한번 드러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딱히 하기 싫은데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던 예시 1, 2, 3조차 이제는 아주 선명한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단지 살기 위해서 하고, 살아졌더니 또 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 하는 게 아니라, 껍데기를 보존하기 위해 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하는 내가 원시적이지 않으며, 삶은 의미롭다. (이것만 봐도 내 껍데기가 이야기임이 증명된다. 혹은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존재 이유가 증명된다. 그 둘은 내게 별 차이가 없다.)
사는 것 그 자체 역시 껍데기를 보존하기 위해 한다. 내가 죽으면 껍데기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껍데기가 거창한 건 아니다. 가꾼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에는 이제서야 약간 풀이 자라난다. 어떤 때는 꽃도 핀다. 근데 아직은 좀 빨리 진다.
하지만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덕분에 하게 될 일과 하지 않을 일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마치 예지력을 갖게 된 것 같다.
지금껏 관측된 내 강우량과 기온과 풍향을 보아하니, 내가 ‘뭔가’를 실제로 행하느냐 마느냐는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않는지와 거의 0에 가까운 상관관계를 보여 왔다. 오히려 ‘하지 않는 나로서 살 수 없는 일’은 반드시 했다. 물론 두 개가 겹치면 제일 좋은 듯하다. 교집합존이야말로 마법이다.
혜원이 전화했을 당시엔 이미 교집합존을 발견한 지 몇 년이 된 상태였으며, 그것을 최우선시하기로 마음 먹은 터였다. 그래서 한때 1인 가구가 남발하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주 많이.
<나름 정성껏 엮어낸 해답>
자리가 없는 곳에 일부러 자리를 만들려고 했더라면 봄이 지나 여름이 되는 그 한 계절조차 넘기지 못하고 우리의 ‘뭔가’는 끝났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누와 간장과 손톱깎이에 묻혀 질식사했을 것이다. 아니면 표면밖에 없는 상태의 내가 보기에 충분히 다급하지 못한 모그타는 (결과를 약속하지 못하는 모험은 대개 그렇다) 더 급한 일들에 밀려 표면에 붙어 있기는커녕 내 궤도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혜원과 통화했을 때 나는 자잘한 1인 가구들의 무덤을 세우고 허는 뻘짓을 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또한 표면만 남은 상태가 아주 원시적이라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집합존에 대한 인식이 생겨 있었다.
더욱 타이밍 좋게는, 그 교집합존에 대한 공포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하지 않으면 망하는 일이 일체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무섭다. 그래서 아마 나는 그렇게 많은 우회로를 거쳐 1인 가구의 감옥을 헐고, 표면에 머물다가, 안과 밖 모두를 지닌 껍데기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이 엄청나게 무서운 상태는 어마어마하게 말이 된다. 누가 뭘 하라고 시킬 필요가 없어진다. 오늘 나의 결심을 웬만해서는 내일의 나에게 미루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내가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할까 봐 무섭다. (이게 바로 새로운 불면의 이유다.)
그 누가 (나 포함) 이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중요하다고 주장하더라도, 아무리 돈이 안 벌리거나 벌리더라도,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적게 걸리더라도, 다만 기준은 ‘이것을 함으로써 껍데기가 되었는가’가 되고, 세상이 선명해진다.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사랑을 한다면 안 하는 것보다야 좋다고들 하지만, 이왕이면 사랑이란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대상보다는 안 하면 무척 괴로운 대상과 하는 게 더욱 극도의 ‘하면 좋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백 퍼센트 안전하면서 극도의 희열을 느끼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동반한 모험성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그때 전화가 온 거였다. 그리고 껍데기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하고 싶고,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다’는 직감에 생각할 필요도 없이 ‘뭔가’를 하겠다고 동의한 거다. 그런데 그 원인은 엄밀히 말하면 ‘뭔가’가 아니라 혜원이었다.
하면 좋은 ‘뭔가’는 세상에 너무 많다. 그리고 ‘뭔가’들을 할 수 있는 방법 또한 너무 많다. 만약 ‘뭔가’만을 보고 달려들었더라면, 그것이 일단 두리뭉실하게 모그타라고 정해진 이후, 안에 있는 걸 드러낸다고 해야 할지, 겉에 있는 걸 깎아낸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도 거치는 중에 있으면서) 그만두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혜원은 하나다.
그런데 하나인 자들 역시 많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혜원은 나에게 ‘궁금한 하나’다.
그런데 왜?
앞서 말했듯이 나는 혜원을 잘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잘 모른다. 나는 ‘껍데기’라는 도구로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혜원은 어떤 식으로 상황을 해석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혜원이 해석을 한다는 것만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우리가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았던 사실이다. 만나지 않았던 십 년 이상의 기간에도 혜원이 해석을 계속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혜원에게는 눈빛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봄부터 여름이 되는 동안 그걸 다시금 확인했다. 혜원은 표면에 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래도 안에 올드보이 감옥이 있는 것 같진 않다. 당연히 뭔가가 있을 것이고, 그게 ‘그로테스크’라는 테마를 표면으로 떠올릴 만큼 암울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일단 나와 같은 패턴의 1인 가구 감옥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아무한테나 ‘뭔가’를 제안한 게 아닐 것 같아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그게 왜 궁금하냐고 물어본다면, 거기에는 내 자유 의지가 들어가지 않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짜장면과 짬뽕 같은 것인데……
아무튼 혜원과 ‘뭔가’를 하는 건 혜원이기 때문에 하는 거다. 그리고 나와 ‘뭔가’를 하려고 한 혜원은 또 혜원만의 이유로 내가 궁금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므로, 나는 나를 그 ‘뭔가’에 조금은 넣어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부담은 갖지 마라. 혜원 또한 억지로 자리를 만들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혜원과의 이 ‘뭔가’가 잠깐이 될 가능성을 고려해봤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껍데기를 잘 가꿔서 거대한 숲을 만드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대청소를 막 마쳤던 시절처럼 1인 가구가 아예 없진 않긴 때문이다.
그렇다. 또 생겼다. 잠깐씩 지나가는 것들을 완전히 피하려고 노력하는 건 에너지 낭비일뿐더러, 지금 얘네도 그렇고, 예전에 헐었던 올드보이 감옥에 살던 애들도 그렇고, 이들의 잔재 중 껍데기가 거름으로 쓸 만한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잘 쓰고 있다. 이렇게 됐든 저렇게 됐든,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나는 지금껏 벌인 자잘하거나 자잘하지 않은 일들의 결과물이다.
아무튼 1인 가구들은 껍데기와는 달라서,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지낼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올드보이 감옥은 절대 아닌, 작은 공유 숙박형 쉐어하우스 같은 걸 상상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요즘에도 수많은 비유적 비누와 비유적 손톱깎이가 입주했다가 떠나간다. 찌개는 못 만든다. 예전과 다른 점은, 어차피 찌개를 만들지 않을 걸 아니까 가져왔던 된장이나 간장은 나갈 때 치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왕이면 모그타가 껍데기와 잘 융화되면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융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실내로 입주시키지 않고 거기에 던져 놓아 보았더니, 모그타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다.
완전하게 물질적이지 않은 개념으로써의 ‘자리’란 건 역시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자리’가 모그타로 어느 정도 채워졌는데도 불구하고 껍데기가 활발히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다. 그 어디도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뭐라도 아무거나 더 해볼까’ 병에 걸렸던 내가 새로이 뻘짓을 벌일까 봐 나타난 귀인이 혜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쓰잘데기 없는 뻘짓 대신에 나는 다른 누군가와는 할 수 없었을 생각을 혜원을 통해서 해보게 되고, 잡스러움이 사라진 머리로 더욱 전속력으로 달리게 되었다. 또한 혼자서는 탐험하지 않았을 껍데기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있다. 안도 있고, 바깥도 있다. 그 둘을 연결할 새로운 길이 매일같이 공사 중이다
지도가 팽창한다. 갈 길이 멀고도 많다.
갈 길의 멂과 많음에 관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가 있다. 거기에 나온다. 도착지까지 가는 여정이 아주 길기를 바라라고. 모험과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하기를 꿈꾸라고. 단, 이 시에서 도착지가 존재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혜원은 여정이 도착지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또한 나도 그러니까, 우리가 여정을 계속하느라 도착지를 놓치진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착지를 정하자는 게 아니다. 도착하려고 여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래서 충분이 할 말을 다 했으니 말인데, 다른 누가 아닌 혜원과 여행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내러티브는 쓰기 나름이고 흩어진 점은 제 맘대로 잇기 나름이라지만, 지금껏 하지 않은 모든 것들과 그로 인해 비울 수 있었던 모든 자리가 여기 모여,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부재가 됨이 나는 매우 만족스럽다. 혜원에게도 우리가 정한 이 ‘뭔가’가 가장 바람직한 것들의 부재와 존재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모그타의 공식적 존재 이전의 마지막 여름, 선풍기 바람에 종이 조각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서재에서
아임이.
2021년 6월